- 작성시간 : 2005/05/24 03:27
- 퍼머링크 : woody79.egloos.com/1351883
- 덧글수 : 7

다른 돈 많은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애인 금홍을 훔쳐보는 이상, 그리고 마주친 눈길을 외면하는 금홍. 이 후반부의 한 장면은 영화 <금홍아 금홍아>를 관통하는 관음증적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두컴컴한 극장안에서 훔쳐보듯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성' 이라는 영화적 특성을 넘어 30년대 경성의 풍경을 우리는 여성의 육체를 탐하는 듯 훔쳐보게 된다.
도대체 왜 이 영화는 중등교육만 받았어도 이름을 알고 있는 천재 시인 이상을 이런 방식으로 그렸는가?
문제는 3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시인 이상에 대한 고민의 부재, 그리고 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을 오해한 감독과 제작자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이상을 다루면서 근대를 연 천재냐 시대를 앞서간 광인이냐 하는 기본적인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대신 금홍과의 관계를 부각시키면서 적극적으로 멜러드라마적인 요소를 가져오는 한편 이상의 지인이었던 꼽추 화가 구본웅을 화자로 선택한다. 구본웅을 맡은 가수 김수철의 미숙한 연기를 탓하기에 앞서 영화적인 구조 자체에서 이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1953년에 죽은 구본웅의 회상으로 30년대 경성 거리를 마주하고, 그의 나레이션으로 영화의 시작과 끝을 보게 된다. 실존인물이자 이미 죽은 구본웅의 시점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것은 감독의 주관과 구본웅의 시각 이라는 이중의 필터를 거친 상태에서 30년대를 마주하는 것이며 그만큼 감정이입을 차단하는 효과를 낳는다.
<금홍아 금홍아>에서 30년대의 경성은 <장군의 아들>과 같이 울분으로 가득 찬 식민지적 공간도 아니요, 예술가들의 고뇌와 열정으로 넘실대는 모던한 공간은 더더욱 아니다. 이상의 대사는 '19세기적 감수성'에 머물러 있는 일반 대중과 문인들을 몇 번이나 질타하고 있지만 영화 속에서 이상이 실천하고 있는 모던한 감수성은 섹스에의 탐닉이외에는 구체적 실체를 찾을 수 없다. 금홍이가 정사 중에 열렬히 외워 마지않던, 그러나 지금도 그리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오감도'의 시인 이상을 영화의 중 후반부까지 난봉꾼과 같은 지식인으로 그린 후 병세가 악화된 후에야 창작에 전념했다는 투로 그리는 것은 더더욱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마치 남편을 위해 몸을 파는 아내가 등장하는 이상의 소설 '날개'를 그대로 가져온 듯 한 후반부의 구태의연한 전개 속에서 피어 오른 창작열로 이상의 작품들을 이해할 수 는 없기 때문이다. 감독은 영화 속 이상은 그야말로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박제되어 버린 천재', 그 자체로 느꼈을 뿐 영혼을 지닌 예술가로서의 자리를 처음부터 마련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대적인 공기는 한복과 양장 몇 벌과 거친 붓 터치의 야수파를 흉내낸 그림 몇 점, 인력거가 지나다니는 그리 길지 않은 거리 풍경을 재현한다고 해서 느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영화 구조상에서 이상을 타자화 시킨 후 '구인회'의 문인들까지도 그와 가끔 권투장에나 다니고, 기생집에서 술자리를 가지며 그를 막연히 걱정하는 듯한 지식인들로 그리는 것은 더더욱 위험한 일이다.
한편 이상에게 인간적인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으로 선택한 것은 가난과 육체적인 나약함이다. 구본웅의 나레이션으로 항상 가난한 가족을 고민했다고 진술해 주는 것, 같이 죽자는 제안에 통닭을 먹기 위해 살아야겠다고 대답하는 가난하고 쇠약했던 김유정에게 강한 동질감을 어필하는 것, 초반부의 권투장의 활기와 병세가 악화된 후 찾은 권투장에서의 심약한 모습 등을 대비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구태의연한 대비와 면죄부를 주기 위한 에피소드의 나열일 뿐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모두 30년대와 이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시대와 인물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이어지는 정사 장면과 공허한 웃음, 그리고 배경으로서의 시대에의 재현은 우리를 그 시대의 한가운데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이국적인 풍경을 한발짝 물러서 훔쳐보게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오감도'의 연재를 포기하면서 영화 속 이태준은 '도대체 그걸 읽는게 무슨 의미냐, 독자들이 그걸 어떻게 이해하겠나'라고 이상에게 묻는데, 이 물음은 그대로 <금홍아 금홍아>를 만든 작가와 감독에게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를 이해 못해?' 라며 의아해 하는 이상의 모습이 서글픈 것은 10년 전의 이 영화는 물론이요 지금까지도 그와 그가 살았던 시대의 '모던'을 오해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덧글
근데 이런거 맨날 하는 글쓰기라,,,ㅋ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