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픽션들」로 본 두 편의 영화 - <올드보이>와 <거미의 계략> review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표적 단편집 「픽션들」은 난해함과 지적유희의 경계에서 오는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문학을 공부하며 느꼈던 전통적인 문학에 대한 관점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동안 '리얼리즘'이라는 사조에 경도되어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기존의 서사구조와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소설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후기구조주의 등 20세기 후반의 철학 사조로 거론되는 보르헤스에 대한 평가는 뒤로하더라도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유, 지적 논의에 대한 소설쓰기 등 철학사적으로나 문학사적인 기여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듯 싶다.
또한 보르헤스의 연보를 살펴보면 장편소설은 단 한편도 발견되지 않는다. 단편소설·시·에세이만으로 필모그래피가 채워져 있는데, 그의 단편들은 보르헤스가 왜 '서사구조'가 중요한 요소인 장편 장르에 도전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소설안에서 제시해 주고 있다. 의식세계의 직접적 기술, 지식인의 관점에서 개인의 비이성적, 주관적 사유를 기술하는 그의 작품들은 기존의 문학적 관점에서 '서사적' 글쓰기의 형식에 연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이론서에나 등장할만한 진리, 기억과 역사, 시간과 공간, 신과 이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보르헤스는 그의 단편들 속에서 간단한 상황제시와 직접적인 언술을 통해 소화해내고 있다. 이러한 관념의 직접적 서술을 통한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들은 형식적 특징을 공유하는 몇 가지 범주로 유형화 할 수 있는데 탐정, 추리 소설 기법의 차용, 역사적 사실인 듯 하지만 완전한 허구에 대한 글쓰기, 환상적 사실주의가 그것이다. 특히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허무는 듯한 인상을 부여하는 실존 인물과 문헌들에 대한 가짜 각주의 사용은 보르헤스적 글쓰기만의 특징인 해체적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적 특징들을 바탕으로 그는 흔히 근대이후 철학자들의 화두였던 신, 죽음, 시간과 공간, 진리 인식등 인간의 이성에 대한 물음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 결론은 항상 허무주의에 맞닿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보르헤스의 작품 성향을 「픽션들」의 몇몇 작품들을 통해 살펴보고, 박찬욱 감독의 2002년작 <올드 보이>와 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70년작 <거미의 계략>에서의 보르헤스의 영향과 차이점들을 비교해보자.




「픽션들」 - 새로운 소설쓰기

우선 보르헤스의 단편들에 나타나는 큰 주제를 살펴보면, 진리 인식의 문제나 주체·객체의 실존적 문제, 기억과 망각등 이성적 행위에 대한 회의, 비선형적인 시간에 대한 문제제기 등을 꼽을 수 있겠는데 결론적으로 근대 이후의 삶과 존재에 대한 보르헤스적인 해체적 관점에서의 근원적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픽션들』에 실린 단편을 통해 살펴보면 먼저 가짜 각주와 가짜 참고 문헌등을 사용한 가짜 사실주의를 들 수 있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보면 삐에르 메나르라는 사람이 실제 새로운 '돈키호테'를 썼다고 믿게끔 하는 여러 가지 잡지와 문헌,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삐에르 메나르라는 인물 자체가 허구의 인물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연도와 잡지, 문헌등 거의 모든 것이 독자가 믿게끔 유도하기 위한 허구적 장치임을 알 수 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라는 작품에서는 아예 '브리태니커' 사전을 패러디 한 '영미백과사전'을 등장시켜 독자들에게 있을 법한 허구를 믿게끔 만드는데 이러한 가짜 사실주의적 기법은 작품들 도처에 나타난다. 이러한 보르헤스의 가짜 사실주의 기법은 상호텍스트성과 패러디가 범람하는 포스트 모던 문학의 원전이 되는 듯 보인다.
'탐정소설 장르'도 등장하고 있는데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나 「죽음과 나침반」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어떠한 '진실'을 '찾기'위한 구성이나 추적의 모티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물음을 독자에게 던지며 게임을 거는 보르헤스의 주제와 맞닿아 있는 듯이 보인다.
몇몇의 작품들은 '진리'에 관한 그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데 「알렙」이나 「바벨의 도서관」등이 그러하다. '바벨의 도서관'에서 등장시킨 모든 진리의 기초가 되는 책들의 책, 「알렙」의 처음과 끝, 또 다른 세계, 우주를 포괄하면서 진리와 신에 대한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는 어떤 공간 지점으로서의 알렙. 보르헤스는 무한한 우주에서 유한한 인간을 대비시키며 진리 탐구의 허구성을 얘기하고 있다. 진리가 결국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소각될 것이며 기억의 무한함에 기인해 진리는 왜곡될 수 밖에 없음을 규명하고 있다. 왜곡되고 조작된 정보가 진리를 움직일 것이며 현대인의 절대 진리라는 것도 그렇게 애매모호하고 불투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은 「원형의 폐허들」에서 나타나는 주체와 객체의 문제, 「기억의 왕 푸네스」에서 보여지는 기억과 망각의 문제에서도 더욱 잘 드러난다. 주체로서 자신이 꾸는 꿈과 객체로서 다른 꿈의 나의 문제가 '원형의 폐허들'에서 언급된 문제인데, 이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언급되었던 무수한 시간들의 선택의 문제와 맞물려 개인의 선택의 중요성을 얘기하고 있다. 결국 어떠한 주체적인 삶이나 선택들도 다른 이의 선택에 있어서는 객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시간의 선택 또한 무수한 시간들중의 하나라는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그의 작품들 속에서 무수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통해 구체화되는데 이러한 지식들도 그의 선택의 문제로 대입시킨다면 모호한 진리들 중 진실을 살짝 비트는 상황 논리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다는 함정에 놓이게 된다.
마지막으로 기억의 문제를 「기억의 왕 푸네스」를 통해 살펴보면 보르헤스는 세분화된 시간과 쌓여 가는 기억들을 안고 사는 푸네스라는 인물을 통해 기억을 재현과 동일한 시각으로 보는 한편 망각과도 동일시하고 있다. 기억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은 망각이 있어야만 기억 행위가 가능하며, 이러한 불완전함을 맞추는 추상화 과정, 배제와 선택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기억이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기억이란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선택에 의한 망각과 선택적 왜곡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라는 것이 보르헤스의 관점이다. 이러한 개인의 기억은 결국 과거와 역사의 문제로 치환될 수 있기에 망각으로 연결되고 결국 보르헤스가 세계를 추상화되고 비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느냐 하는 비판의 단서가 된다. 후배 작가이지만 마르께즈가 지나온 시간에 대한 기억, 남미의 역사적 상황속에서 의도적으로 지워진 사실들에 대한 기억을 중요시 한다는 점에서 더욱 보르헤스의 망각의 코드를 의심스럽게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원형적 세계속에서 바라보는 인간 진리에 대한 무상함, 내러티브 서사를 포기하고 철학적인 물음들과 무수한 각주들 사이에서 유영하는 문체, 시공간의 진리속에서 문학이라는 글쓰기라는 텍스트 저작 행위에 대한 탐구, 진리 탐구의 무의미함과 애매모호함 등이 보르헤스의 문학적 주제가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제를 역설하는 보르헤스의 문학관이 위에서 꼽아본 문체적 특징과 더불어 허무주의를 내포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작가로 손꼽히는 이유인 듯 싶다.




<올드 보이> - 복수라는 원형 앞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전도

현대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적 아버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는 어떻게 한 인물이 배신자와 영웅의 두 얼굴로 사람들에게 그려질 수 있는가 하는 진리의 이면에 대한 짧은 고찰이다. 베르톨로치의 영화 <거미의 계략>의 원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역사적으로 영웅으로 추앙 받던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고향에서 아버지가 영웅이 아니라 실은 배신자였음을 알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공인된 의심할 필요 없었던 사실이 조작된 기억이었다는 진리 인식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데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에서는 이러한 기억과 시간의 문제, 복수를 중심으로 한 주체와 객체의 전도 등 보르헤스적 화두를 발견할 수 있다.
박찬욱의 영화는 감독 자신이 밝힌 데로 죄의식과 구원의 문제를 전제로 분단 이데올로기, 계급적 갈등, 금기에의 도전등을 소재로 끌어들인다. '우연과 운명의 변증법'이라고 명명하고 싶은 박찬욱의 내러티브 구조는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로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우연한 사건에 의해 인물들간의 관계가 촉발되면서 분단 이데올로기, 계급 갈등, 근친상간과 같은 운명적, 사회적 구조에 휘말리게 된다.
'복수 3부작'의 중 두 번째 작품인 <올드 보이>는 전작과 같은 '우연과 운명의 변증법'과 '죄와 구원'이라는 박찬욱식 세계관에 사회적 금기에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인물을 형상화 한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산다는 신조를 가진 오대수는 아내와 다섯 살 난 딸아이를 가진 평범한 샐러리맨인데 만취한 어느 비 오는 귀갓길에 누군가의해 납치를 당하고 15년 동안 갇히게 된다. 나름대로의 '악행의 자서전'을 쓰며 '누가’가뒀는가에 집착하는 동안 복수심은 극에 달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가 아니라 '왜' 풀어주었는가 하는 문제였다. 영화의 중반부, 감금을 한 당사자 이우진의 설명으로 밝혀지는 이 명제는 복수의 주체가 뒤바뀌게 되는 반전의 실마리이다.
15년 동안 복수만을 갈망해 온 대수는 '누가', '왜' 자신을 감금하였는지 알게 되었음에도 성격화되어 버린 '복수심' 때문에 우진에게 누나와의 근친상간의 비밀을 폭로하고자 찾아간다. 관객의 감정이입의 대상이자 복수의 '주체' 오대수는 풀려난 후 사랑에 빠진 미도와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된다. '왜'라는 명제는 대수가 15년 전 헤어진 딸 미도와 근친상간의 처지에 빠지게 하는 것, 우진의 복수가 자신과 동일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대수는 복수의 '객체'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주·객체의 관계는 결국 복수의 시점, 복수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문제일 수 밖에 없는데 우진의 고백이후 주체와 객체의 문제는 실상 불필요한 것이 되어 버린다. 우진과 대수는 결국 '복수'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금기'를 넘어버린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의 관계로 뒤엉켜 묘한 대칭성을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찬욱은 관객에게 우진에게도 감정이입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복수'의 덧없음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대수가 '복수'의 감정을 '성격화' 할 수밖에 없던 근원은 15년이라는 시간을 망각하지 못하고 떨쳐버리지 못한 '기억’과‘선택’에서 기인한다. 15년 동안의 세월은 풀려난 후 5일과 맞바뀐 셈인데 이 시간은 대수의 선택이 아닌 이우진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위의 복수의 시점에서도 언급했지만 선택의 주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진이 댐에서 투신하는 누나의 손을 놓았던 79년, 대수가 구속된 삶을 보상받기 위한 복수의 5일은 15년을 뛰어 넘는 동시에 동일한 의미를 갖는 시간이다. 대수와 우진은 15년과 5일을 맞바꾸고 선택의 주체가 누구든 오직 복수를 위해 심리적으로 정지된 시간을 살았다는 점에서 동일한 '올드 보이'인 것이다.
깐 영화제가 인정한 <올드 보이>의 장르적 완성도는 박찬욱의 전작들에서부터 발견된 것이지만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짜 사실주의 혹은 가짜 각주와 같은 인용구들과 영화적 농담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15년의 세월과 80, 90년의 주요 역사적 장면을 TV 뉴스 화면과 교차시키는 아이디어는 차라리 정직하다. '짐승만도 못한 인생이지만 살 권리는 있다’,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만 혼자 울게 될 것이다.’, '모래알이든 바위든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는 익숙하면서 낯선 인용구들은 내러티브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계속해서 인용된 잠언 6장 4절,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친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는 성경구절이 대수의 절박한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식이다. 특히 첫 장면에 등장한 수간을 상징하는 듯한 자살남의 '짐승만도 못한 인생의 살 권리'라는 명제는 근친상간의 금기를 넘어서지 못해 최면술사에게 애원하는 대수의 상황을 앞뒤로 구조화한 농담인 것이다. 이러한 인용구들을 확장시킨다면 서사 장르의 원천인 신화적 코드들도 엿 볼 수 있는데 고대 그리스 비극 『엘렉트라』나 '판도라의 상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같은 신화적 코드의 언급은 식상할 수 있지만 반면에 그 만큼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요소를 차용한 것이기에 깐 영화제에서도 소통할 수 있던 것이며 박찬욱의 감각을 평가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다양한 문제의식과 개성적인 관점으로 '죄의식과 구원'에 관한 '복수 3부작'을 완성해 나가고 있는 박찬욱은 죄의식에서 벗어나지도, 구원받지도 못하는 인물들간의 관계를 조망하고 있다. 하지만 복수라는 원형적인 인간의 감정과 함께 인간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구원의 세계를 그리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금기에 대한 화두를 정면으로 건드리지 못하고 모든 작품에서 그의 인간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올드 보이>를 비롯한 그의 영화들에서 정말로 마주하고 싶은 인물은 그러한 금기를 자신의 의지를 통해 온몸으로 뛰어 넘으려는 문제적 인간이다. 건조한 느낌의 <복수는 나의 것>이 계급적 인식만큼이나 '차가운' 시선으로 인물들을 바라보며 모두 죽여버리는 한바탕 유머 활극이라면 <올드 보이>는 인물에 대한 연민이 지나쳐 '뜨거운' 감정이 넘쳐흐르는 멜러 드라마이다.
'구원받지 못할 바엔 차라리 죽어버려라!' <복수는 나의 것>을 함축하는 저 명제가 그리워진 것은 오대수에게 '짐승만도 못하다 해도 살 권리를 부여'해 주고 있는 마지막 장면의 미소에 대해 근심스러워 졌기 때문이다.





<거미의 계략> - 파시스트 아버지에 대한 긍정과 부정사이

1930년대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암살 당한 아버지의 고향 '타라'를 찾은 아토스 마냐니는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는 아버지의 동상이 세워진 광장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한 파시스트를 찾아 나선다. 아토스는 아버지의 옛 정부와 반파시즘 투쟁의 동료들로부터 그가 죽게 된 당시 상황을 듣게 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을 탐문하면서 그는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거듭되는 의문의 미로에 빠져든 마냐니는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하지만 아버지가 살해당한 그 날과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면서 사건의 전말이 정리되어 가고 결국, 그는 아버지의 동료들로부터 진실을 듣게 된다. 파시즘의 스파이는 바로 아버지였으며 그 사실을 알게된 동료들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것을, 또한 그 죽음은 아버지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침내, 배신자를 영웅으로 만든 신화는 아버지가 배신 행위를 뉘우치면서 동료들과 함께 꾸며낸 조작된 계략에 불과했다는 숨겨진 진실을 알게된 아들은 이를 밝히는 대신 침묵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이미 자신 또한 거짓된 신화의 계략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살인자와 영웅에 대한 논고」를 영화화한 베르톨루치 감독의 70년작인 「거미의 계략」은 정치 영화의 백미로 꼽힌다. 보르헤스의 이 9쪽 짜리 단편이 어떠한 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압제에 시달리고 있지만 끊임없이 저항을 멈추지 않고 있는 한 나라에서 일어난다'라고 서두에 밝히고 있는데 반해 베르톨루치 감독은 자신의 나라의 '파시즘'의 역사를 명백히 언급해 나간다.
보르헤스가 영웅 신화를 통해 진실의 허구성을, 음모를 현실화시키는데 '멕베드'와 '줄리어스 시저'의 장면의 통해 장르간의 상호텍스트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반해 베르톨루치는 자국의 어두운 역사적 과거를 끌어온다. 파시스트와 반파시스트간의 충돌이 존재했던 '타라'라는 마을은 시간이 단절된 공간으로 표현된다. 이는 단순히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1인 2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토스가 찾아간 30여년 뒤의 시간이 무의미함을 보여준다. 아토스역의 배우가 아버지의 배역을 그대로 맡은 과거 회상씬에서 등장하는 친구들과 마을사람들의 모습은 현재의 그 모습과 외향은 물론 성격까지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의 폭력적인 광기가 휩쓸었던 30년대의 이탈리아라는 지리적 역사성은 보르헤스가 단지 분쟁의 지역으로 선택한 아일랜드와는 차원을 달리하게 된다. 아버지의 추악한 과거를 알게 되는 아토스는 역사를 통해 자신들의 과거를 통렬히 반추하는 이탈리아 지식인의 감독의 자의식으로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진실을 알게됐음에도 아버지의 죄를 고백하지 못하는 '아토스'의 모습에서 바로 '파시즘', '전체주의'의 계략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파시즘의 계략이 무서운 것은 역시 역사라는 '시간'의 산물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재형으로서의 우리의 모습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친구들이 동일한 모습(과거에서든 현재에서든)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타라'에서 아토스가 느끼는 두려움. '이 마을은 정말 이상하다'며 진저리를 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무언가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아버지의 친구들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파시즘의 잔재는 그렇게 역사의 잔영을 뒤로한 채에도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베루톨루치는 이러한 시간의 경과를 고정된 듯하면서 좌우로 유영하는 카메라 워크를 통해 내면화해낸다. 보르헤스가 짧은 단편에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제시했던 문제를 베루톨루치는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을 가지고 생생히 영상화해내고 있다. 제목이 시사하고 있는 바, 중요한 것은 영웅과 배신자에 대한 뒤바뀜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역사적 모순을 가능케 했던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근대 철학의 경험론과 합리론에서 세워졌던 근대, 지성에 대한 개념에 대한 회의를 보여준다. 또한 근대의 시간 개념인 직선적, 진보적, 단선적 시간개념을 거부하고 발산의 개념, 선택 가능한 시간 개념을 도입했다. 또한 진리 인식의 불완전함, 인간 기억의 불완전함 등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근저로 한 작품 세계를 펼쳐왔으며 지식인적 관점에서 개인의 비이성적이고 주관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한 문학 세계를 보여주면서 카프카와 포에서 영향을 받은 환상문학을 펼쳐왔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마술적 리얼리즘' 보다는 환상 문학에 가까운 작가일 것이다. 아무래도 역사적인 사실과 총체적인 사회구조에 관심을 두기보다 존재론적이고 근원적인 철학적 문제에 경도되어 있으며 차라리 몰사회적이라 부를 만큼 모든 문제를 근본적 허무주의로 환원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두 영화와의 비교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올드 보이'를 통해서는 그의 코드들이 21C기 영화에서도 영향력을 충분히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허무주의를 비롯한 포스트 모던한 감각들은 올 한해 가장 잘 만든 영화에서도 충분히 살펴 볼 수 있는 시의성과 영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문제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가 베르톨루치의 '거미의 계략'이 아닌가 싶다. 예술이라는 장르가 근원적인 존재적 성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와 사회적 맥락안에서 소통할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자장아래 놓여있는 70년대 현재형으로서의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논하고 있는 '거미의 계략'이 날카로운 성찰을 보이면서 더욱 절절하고 다가온다.
문학과 영화라는 예술 장르는 인간의 존재적 성찰을 당연히 필요로 하지만, 그 토대를 기반으로 한 역사와 현실을 외면하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덧글

  • _푸훗_ 2005/09/07 21:19 # 답글

    보르헤스 검색하다가 들어왔습니다. 올드보이와 보르헤스의 교차는 흥미로운 주제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꾸벅.
  • 혜정 2005/10/01 22:16 # 삭제 답글

    컴퓨터로 긴 글 읽는 거 무지 싫어하는데, 보르헤스에 끌려 읽게 되었네요. 아직, 다 읽지도 못했는데.ㅠ 과연 보르헤스를 언제 제대로 읽게 될지 의문입니다. ^^;
    글 쓰고 싶은데,,못 쓰겠어요. 생각없이 살아서인가..ㅠ
  • 히히히 2011/11/23 16:00 # 삭제 답글

    깊은글잘보구 갑니다! 영화 거미의계략보구 검색해서들어왓어요;) 보르헤스의 <살인자와영웅에대한논고>도읽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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