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치의 세계에는 인생의 희노애락이 있다 <서유기 월광보합>과 <서유기 선리기연> review



 성치세계에 입문시켜 준 <서유기> 시리즈

"사랑의 기한을 정한다면 1만 년으로 할 것이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서 금성무가 멋들어지게 소화해 낸 이 명대사가 주성치의 입에서 발성된다면? 물론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의 성치형님은 이 명대사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멋들어지게 패러디 해냈다. 그가 손오공으로 분한 <서유기 선리기연>(이하 <선리기연>)에서 주성치는 <중경삼림>의 금성무와 <동사서독>의 양조위 못지 않은 로맨틱 가이(?)로 변신, 시간과 사랑에 대한 그만의 오딧세이를 창조했다.

그야말로 성치세계에 입문한 자와 입문하지 않은 자의 취향으로 나뉠 수 있는 주성치의 <서유기> 시리즈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고전 '서유기'의 외전을 가지고 철학과 사랑과 패러디가 난무하는 한바탕 잡탕극으로 감동을 자아내는 경지를 보여준다.

때는 1999년 가을. 군입대를 한달 앞둔 난 그야말로 영화세상에 푹 빠져 살았었다. 당시 우리동네 비디오 대여료가 구프로일 경우 편당 2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이었기 때문에 1000원 한 장 들고 보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골라보는 재미를 누릴 수 있었다. 군 입대 한달전이야 누가 터치할 사람도 없었거니와 영화광을 자처하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제철을 만난 물고기와 같았다고 할까?

사실 난 그때까지 90년대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서 홍콩의 최고스타였던 주성치를 폄하하고 있었다. 아트영화로는 왕가위, 오락영화로는 성룡을 최고로 치던 그 시절, 성치세계에 입문하기 전이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99년 9월 KINO라는 잡지가 소개했던 주성치의 기사를 본 후, 난 반신반의하며 비디오 가게에서 <서유기 월광보합>(이하 <월광보합>)과 <선리기연>을 집어들었다. 물론 두 편에 400원이라는 초저렴 가격에 말이다. 그 이후 나에겐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유기> 시리즈는 중국인은 물론 우리에게도 익숙한 고전 '서유기'를 그만의 세계관으로 재해석해낸 걸작이다. 원작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방자하고 무례한 행동으로 관음보살의 노여움을 사, 삼장법사 일행과 서역으로 불경을 얻으러 가게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주성치와 감독 유진위는 여기에 500년 후에 태어난 지존보(주성치 분)라는 사막의 무리배 두목이 바로 손오공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영화를 시작한다. <월광보합>은 그 자체로는 서유기와 무관한 듯 싶지만 영어제목인 'A Chinese Odyssey'에 걸맞게 500년에 걸친 사랑과 운명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다.

두 여자 요괴 춘삼십낭과 백정정(막문위 분) 자매는 각각 삼장법사의 고기를 먹고 불로장생하기 위해, 또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바람둥이 손오공을 찾기 위해 지존보의 사막에 들어섰다. 지존보와 백정정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우여곡절 끝에 지존보를 오해한 백정정은 자살을 선택한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지존보는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월광보합(주문은 바로 그 유명한 '뽀로뽀로미')을 사용하지만 실수로 500년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문득 봐서는 그리 <서유기>와 상관없을 듯한 <월광보합>의 내용은 <선리기연>과 동일선상에서 놓고 봤을 때는 무릎을 칠만한 아이디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500년 전으로 돌아간 지존보가 자하선사와의 인연으로 이 광대한 시간 여행의 핵심이자 손오공의 운명을 결정짓는 터닝포인트를 맡기 때문. 후에 지존보가 진실한 사랑임을 느끼는 자하선사가 지존보의 발바닥에 손오공의 표식인 점 세 개를 찍음으로서 500년 전후의 상황이 기막히게 이어지며 복잡한 인연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선리기연>은 이중인격을 지닌 여래불상의 수호자 자하선사(<동사서독>의 임청하의 패러디>)와 손오공의 다하지 못한 가슴아픈 사랑을, 그리고 그를 방해하는 우마왕과의 결투를(우마왕은 500년 후인 <월광보합>의 시간대에도 등장한다), 서역으로 불경을 찾으러 떠나야 하는 사명을 지닌 손오공의 숙명을 모두 믹스한다.

그러니까 '빽 투더 500년'인 이 상황에서 지존보는 손오공인 자신을 알아보는 삼장법사와 저팔계, 사오정을 만나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깨달아 간다. 하지만 500년 후의 사랑인 백정정의 목숨을 되돌리기 위해 월광보합을 얻으려 하지만 자신에게 일편단심인 자하선사와 사랑의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그 사이 서역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손오공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은 시시각각 지존보에게 다가온다.

자, 여기까지 보면 주성치의 <서유기> 시리즈는 더없이 진지한 고전 <서유기>의 외전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주성치가 이 진지한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그만의 개그를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속에서 그는 절대 웃지 않는다. 상식적인 눈으로 볼 때 순간순간 황당무계한 상상력이 펼쳐지지만 주성치는 매순간 진지하게 사랑을 논하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또 하나 <선리기연>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당시 젊은 영화광들 사이에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왕가위 감독에 대한 패러디다. <동사서독>의 제작을 맡았으며 <동성서취>를 감독했던 유진위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선리기연>은 사막의 한 복판에 사랑의 시를 읇는 <동사서독>의 양조위를(이 장면은 손오공이 된 지존보가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는 이중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중경삼림>에서 금성무의 대사를 기가 막히게 패러디해 낸다. 여기에 절벽에서 떨어지며 못 이룬 사랑을 죽음으로 갈구하던 <동방불패>의 마지막 장면까지 완벽하게 재현해 감탄을 자아낸다.

물론 이러한 패러디로 끝났다면 무협코믹물에 머물렀을 터, <서유기> 시리즈는 주성치의 일관된 주제의식인 밑바닥 인생이 영웅으로 거듭나는 서사구조를 취하고 있다. <서유기> 시리즈는 사막의 무지몽매한 패거리의 두목이었던 지존보가 500년을 뛰어넘어 사랑과 인연, 희노애락을 모두 겪은 후 불경을 얻으러 떠나는 손오공으로 탄생하기까지의 역경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했다.

이는 멀게는 중국에서 건너 온 촌뜨기가 최고의 도박 영웅이 되기까지를 그린 주성치의 출세작 <도성>에서부터 홍콩 최고의 요식업계의 거부였으나 건방졌던 식신이 밑바닥을 거쳐 인간미를 겸비한 인간으로 재탄생하는 그의 최고 걸작 <식신>, 그리고 최근작 <소림축구>와 <쿵푸허슬>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 작품을 아우르는 공통된 주제의식인 것이다.

'뽀로뽀로미'라는 포복절도할 주문과 "사랑의 기한을 정한다면 1만 년으로 할 것이다"라는 절절한 명대사가 공존하는 <서유기> 시리즈. 성치세계의 입문하지 않았다면 맛보지 못할 쾌락을 선사해 준 나만의 불후의 걸작이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