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에 관한 ‘악행의 자서전’



모니터 앞에 앉자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어야 했던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된 심정이 되어 버렸다. 누가 자신을 감금했을까를 미친 듯이 추적해야했던 오대수처럼 ‘악행의 자서전’을 쓰는 기분이랄까. 서른 해 가까이 살면서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어떤 선물을 주었나를 떠올려 보니 별다른 ‘결정적’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 아닌가. 이런 박복하고, 각박한 인생이라니. 그러다 문득 내가 삽 십 평생(?) 핑계를 대고 있었던 건 아니었나 하는데 까지 생각이 미쳐 버렸다. 


우리 집은 여유롭지 못한 집안 환경인데다 부모님도 워낙 먹고 사는데 바빴기에 가족끼리  생일을 챙기거나 할 형편이 못됐다. 아버지 생신이야 당신이 워낙 친척들을 좁은 집에라도 불러 술판을 벌이는 게 인생의 낙인지라, 어머님은 음식 장만으로 전날 하루를 꼬박 보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어머니 생신은 물론 자식들 생일도 미역국으로 족했다. 그랬으니 선물을 주고받는 그 좋은 풍습이 몸에 밸 여유가 있었으랴. 그러니까 내가 처음 받은 선물은 가족들에게 받은 생일선물이 아니었다. 내 유년시절, 제과 업계의 상술에 놀아나 동네 슈퍼마켓에서 코 묻은 돈을 쥐어주고 초콜릿을 사줬던 초등학교 여자 동창들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 간 이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학생회를 한답시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외치고 다니던 그 시절, 같은 학과 사람들은 초코파이로 만든 케이크에도 환하게 웃고 열쇠고리 하나에도 ‘고마워’를 연발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게 다 막 ‘IMF’가 닥쳤던 그 시기, 다소 촌스러웠던 과 분위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이 우리 집 형편은 더 나빠졌고 2학년이 됐을 무렵, 난 복학을 한 7살 터울의 형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휴학을 해야만 했다. 그 무렵 그간 학생회는 물론이요 무려 3개의 소모임을 꾸려가던 난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며 학교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지만 2학년이 됐다는 책임감 비슷한 감정이 있었던 듯도 싶고. 요즘에야 직장인들에게는 ‘지름신’이 강림한다고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의 즐거움’ 만큼 강렬한 욕망은 당연지사. 없는 살림이라고 다르겠는가. 시간당 2천원의 아르바이트생 신분임에도 난 쥐꼬리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는 포만감에 지인들의 생일에는 죽어도 선물을 챙기고 싶어졌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돈을 벌고 있잖아’라는 어줍지 않은 생각이었던 걸까? 그때 ‘유레카’라고 외친 곳은 바로 학교 앞 꽃집. 값싸지만 왠지 의미 있어 보이고 나름 예쁜 포장까지 곁들여주는 화분들이 발견 대상이었다. 밀레니엄이 당도하기 바로 직전이던 그 시절, 난 화분을 들고 거리를 거닐 던 ‘레옹’이 되었다. “니가, 무슨 레옹이냐? 너 겉멋이지”란 오해 섞인 놀림을 감수하면서 그 많던 모임 생일 자리에 선후배 가리지 않고 균등하게 5천 원짜리 선인장 화분을 안겼더랬다. 지금 생각하면 자기만족과 남들 이목을 고려한 잔머리의 발로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이지만. 그 덕분에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 꽃집 앞을 지날 때면 예쁜 장한 꽃집 주인아주머니가 반가이 맞아주긴 하지만 말이다. 


선물에 대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추억은 졸업 직전 6박 7일간 떠났던 중국 여행에 관한 일이다. 백수의 길에 들어서기 직전, 논문 지도를 받았던 노교수님의 엄포로 인해 난생처음 중국 북쪽인 ‘연길’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자의반 타의반 학교 차원의 답사 비슷한 행사에 끌려간 난 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인생에 다시없을 호의호식을 누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역시 선물이란 놈이 걸림돌이 됐다. 1,2학년 후배들이야 들뜬 마음으로 여기저기 쇼핑에 나섰지만 난 가벼운 주머니를 만지작하며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찌됐든 첫 해외여행 아닌가. 고민 끝에 아버지에게는 슈퍼마켓에서 저가의 중국술을, 어머니에게는 백두산 기슭에서 조선족이 팔던 꿀을 사다드렸다. 얼마짜리인지 모르는 부모님은 끝까지 아들자식이 왜 중국에 갔다 왔는지 자세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말없이 받기만 하셨다. “중국 물가가 엄청 싸요, 제가 취직하면 가족 여행 다함께 가요”라는 말을 호기롭게 날렸지만 왠지 모를 죄스러움은 한동안 가시지가 않았던 것 같다. 친구들 선물은 더 가관이었다. 일정 중 다 쓰러져 가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 방문 코스가 있었다. 거기서 우리 돈으로 3~4천원 정도하는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사왔다. 허접한 종이 질에 촌스러운 디자인이었건만 다른 ‘메이드 인 차이나’와는 수준이 다른, 윤동주 생가에서만 살 수 있는 책이라고 우기며 몇몇 지인들에게 건네 줬었다. 물론 국문과 출신인 과 선후배들은 더없이 좋아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행 후 취직하기까지 두 달여간 난 이유 없는 부채의식에 시달려야 했고, 그 선물은 지금도 왠지 부끄러움으로 남아있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들 때 즈음 TV에서는 우연히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요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다는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백수 준하가 바로 그 주인공. 설날을 앞두고 부모, 아내, 동생 할 것 없이 사회생활을 하는 온 가족들에겐 한가득 선물이 배달되어 오지만 빈손인 백수 준하는 비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준하는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일하는 후배에게 부랴부랴 영덕 대게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그러마한 후배의 답변에 준하는 호기롭게 큰소리를 뻥뻥 치지만 배달은 늦어지고, 하필이면 그때 옆집으로 배달된 랍스터를 제 것인 냥 온 가족과 나누어 먹는다. 결국 파출소까지 가게 된 준하. 아무리 시트콤이지만 ‘선물’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들게 하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었다. 사회인이라면 누구나 받고 줘야 할 명절용 선물, 또 선물로 결정되는 사회적 지위와 계층. 연인 사이라도 모두 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의 연인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디에 의미를 둬야할지 모를 이 선물이라는 놈의 정체에 갑자기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사실 문제는 오롯이 나에게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현재의 나는 시트콤의 준하처럼 전업 백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부럽지 않는 연봉을 받는 샐러리맨도 아니다. 반면 선물이란 놈이 내 위치와 계급을 결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에는 아직도 자신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난 여전히 핑계만 대고 살아 온 ‘소심남’이지 않았을까. 나이를 먹었으니 명절 선물도 부모님께 가져다 드려야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적어도 남들처럼 근사한 선물 하나는 안기고 싶고. 과거나 지금이나 실행은 옮기지 못하면서 항상 남 눈치를 살펴왔던 건 아닌가 말이다. 내 선물에 관한 ‘악행의 자서전’은 그렇게 그 동안의 선물은 모두 자기만족에 불과했다는 결론을 내려주고 있었다. ‘레옹’의 화분도, 윤동주의 시집도 다 그런 자기위안의 발로였던 것이다. 문득 이러다간 정말 ‘시트콤’ 의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씁쓸해져 버렸다.


선물이 마음의 표현이란 걸 믿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자, 남들 눈은 이제 그만 의식하자. 평생 해왔던 핑계도 지겨울 때가 됐다. 마음이 가난한 것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을 고쳐먹으니 먼저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 올 봄 환갑을 맞으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 마음이 중요해! 그것도 자기만족 아니냐는 악마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도 하지만 귀를 막아 버렸다. 서른이 되기 바로 직전, 진심어린 상대방을 배려하는 화분과 시집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3월 초 생일을 맞는 10년 지기 친구 놈에게는 처음으로 선물다운 선물을 해봐야겠다. 아, 벌써 들뜨면서도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삶이 보이는 창' 3,4월호
by woody79 | 2007/04/06 20:33 | chat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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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04/07 00:0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주차장 at 2007/04/10 03:54
요새는 가족끼리는 선물보다 돈이 오가는 모습이...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그래도 선물을 고집하는 편인데... 받았을때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그리도 기쁠 수가 없죠...

예전 조카녀석 초등졸업식때 만년필을 선물했더니... 흠... 뭐랄까... 그런것들을 만져보지 못한 세대라 그런지 무척이나 좋아하는 모습이... (제가 받았다면 당시 진부하다 느꼈을 것인데 말이죠)
Commented by woody79 at 2007/04/18 18:37
주차장님/ 돈...이라. 사실 그래서 더더 선물에 대해 소극적이 되어 가나 봐요.
그래서 최근에도 한 번은 시간이 없어서 맛난 케익과 재즈바에 데려가 주는 걸로 선물을 때웠다는...ㅠ
Commented by woody79 at 2007/08/03 02:30
때때로진실님/ 힝. 이란 추임새에 모든게 이해가 간다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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