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리안과 지도부 view



안국동 삼거리에서 대치중이었다. 아니, 경찰이 잠깐 쉴 틈을 줬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청와대쪽에서는 진즉에 대치중이었고, 종로 방면에서 새로 전경들이 들이 밀었다. 갈 곳은 당연히 그 후면 종로경찰서 방면으로 나가 종로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답답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대치에 사람들만 빠져나가고 있었다. 쪽수가 버티면 경찰들은 치지 못한다. 연좌시위를 하거나 후미로 빠져 행진을 해나가야 할 판인데 아무도 그걸 얘기하지 않았다. 어떤 30대 누님이 뒤로 빠지자고 소리를 쳤다. 그래 공감하는 사람이 있구나 말을 맞췄지만 누구한테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다. 그럼 저기 '아고리안'에게 얘기해보라고 한다. 뭔가 지도부 필이 나는 그 청년에게 가서 뒤로 빠져서 종로로 나가자고 해 봤다. 지금은 종로쪽을 사수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더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여기를 지켜서 무엇할꺼냐고 물었지만 그럼 어디로 가야하느냐고 되묻는다. 답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리고 5분 뒤 양쪽 방면에서 전경들이 치고 올라왔다. 사람들이 뛰기 시작한다. 어느 쪽은 천천히 함께 해야한단다. 미치겠다. 빨리 뛰세요, 종로 쪽으로 우회전 하세요. 젠장, 목이 쉬었다. 그곳으 지켜야 한다던 그 '아고리안'이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 다들 뛰어가면 종로를 다시 점거할 수 있는데. 그렇게 계속 서울 시내를 돌며 시민들에게 목소리를 내야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대오는 시청 광장으로 안착했다.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낙원상가를 지나기 바로 직전, 대학생 학생회 간부되는 친구가 대열을 통솔하고 있다. 선두와 거리가 멀어지자 "앞에 분들 같이 가요, 조금 천천히 가 주세요"라고 독려한다. 이런. 조금 전 우리를 쳤던 전경들이 종로 방면을 막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또 고립되는데 천천히 가자고? 이들은 걷는 것은 익숙하지만 뛰는 것은 낯설어 한다. 가두시위를 나선 사람들인데도 그렇다. 여자들 때문이라고? 전경들이 칠 때는 그렇게 빠르던 사람들이? 빨리 가야해요, 전경들이 막고 있을지도 몰라요, 종로 거리를 사수해야 해요. 이렇게 외치자 그 친구가 다가온다. 조곤조곤, 하지만 목소리를 높여 설명을 해 주니 아무말도 못한다. 알았단다. 난 죄송하다고 했다. 도대체 무얼 통솔하는건지 모르겠다. 그 친구에게는 더 어린 후배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종로에서 청계천을 지나 명동입구로 들어서는 찰라였다. 왼편에서 가던 대열이 오른쪽으로 건넜다 다시 왼편으로 건넌다. 이게 무슨 일인가. 바로 옆에 시청 광장인데. 어디를 가려고? 누군가가 명동성당으로 가자고 했단다. 다시 한번 미치겠다. 거기 가면 고립 뿐인데. 전경들이 양 옆으로 막아버리면 갈 때라고는 안드로메다 뿐인데. 절규했다. 거기 가면 안 되요, 고립되요, 바보들이에요. 그리고 먼저 뛰었다. 옆에는 스무살을 갓 넘긴, 강원도에서 홀홀 단신 올라왔다는 여대생이 같이 뛰고 있었다. 도대체 왜 명성으로 가자는 거에요? 혹시 진짜 프락치가 있는거에요? 다행히 우리가 뛰어가저 저 뒤편으로 대오가 뒤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숨이 턱 까지 차올랐다. 물을 나눠 마셨다. 숨이 찬 거 보다, 마음이, 정신이 답답해서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아고리안 예비역들이 박수를 받았다. 다들 "예비군이 환영 받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남자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래, 대단하다. 어떤 조직도 아니요, 공동체도 아니요, 단지 게시판과 리플을 통해 뭉친 그들. 하지만 시종일관 비폭력을 외치고, 시위대 선두에서 전경들 편을 들어주고 있는 그들은 '사수대'가 아니라 그저 예비군 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 일 뿐이었다. 지치고, 피로하고,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그들은 그냥 방패막이일 뿐이었다.

에둘러 왔다. 그러니까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10년전 어줍잖은 데모의 기억만으로도 사람들을 지휘할 수 있는 나 같은 일개 학생회 조무래기가 아니라 진정한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메이저 운동권이 될 절호의 찬스를 스스로 국말아 드신 다함께를 옹호해 줄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새벽에 정리집회를 이유로 빠져버린 한총련을 원망하는 것도 아니다. 아직까지 깃발을 올리지 못하는 민주노총 또한 '노조=배후세력'이라고 여기는 순진한 시민들 때문이라고 이해해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 운동권, 노조 가릴 때가 아니다. 좀 더 '정치'하고 경험있는 지도부가 필요한 순간이다. 그렇기만 하다면 동이 터오는 순간 물대포에 맞아 만신창이가 될 일도, 아무런 성과없이 청와대 앞에서 닭장차와 씨름할 일도, 전경들과 피터지게 대거리 할 일도 줄어들지 모른다. 운동권이, 노조가, 386이 무슨 죽을 죄를 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잘잘못을 떠나, 방향성을 떠나, 어쨌건 거리에서 '투쟁김밥'을 사먹으며 경험을 기른 것도 그네들이요, '민주시민'들이 이명박을 뽑아놓았을 때 꾸준히 거리에 나선 것도 그들이다. 아고리안이 됐든, 운동권이 됐든, 386이 됐든, 그들을 아우를 지도부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않다면, 5월의 마지막날과 같은 투쟁이 반복된다면 승리는 우리에겐 먼나라 이웃나라 얘기일 뿐이다. 그래서 다시 촉구한다. 같은 현장에서 난 내 귀중한 피를 흘리고, 전경의 하이바를 반쯤 벗기고, 물대포에 아슬아슬하게 눈을 비켜 맞아 실명의 위기를 넘기고 싶지 않다. 빈머리 뜨거운 가슴은 적어도 시위 현장에서는 공공의 적일 뿐이다.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진정으로 지도부가 필요하다. 진. 정. 으. 로.

덧글

  • 땅콩샌드 2008/06/01 14:12 # 삭제 답글

    글쎄요. 운동권의 조직된 시위로 세상이 바뀐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직선제 개헌 또한 모든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통합적인 운동으로 얻어낸 거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운동권들이 시위해서 얻어낸 게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을 때에만 혁명은 가능합니다.
  • woody79 2008/06/02 02:26 #

    운동권의 조직된 시위로 세상이 바뀐 적은 한번도 없을지 모르지만, '민주화'에 대한 그 어떤 지분은 부정하지 말으셔야죠. 아무것도란 그런 자신감 넘치는 단정은 어디서 나오나요?
  • 아이디가없어요 2008/06/01 14:55 # 삭제 답글

    어차피 삼청동에서 안국역쪽으로 밀리고 살수차가 대기하고 있을 때 상황은 끝난거나 다름 없었습니다. 다시 세를 불릴 여력도 시간도 없었습니다.

    이때 예비군들이 아고라인지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예비군중 한분이 경찰쪽 간부와 협상을 합디다.

    '우리가 조계사 쪽으로 빠져서 시청광장으로 갈테니 그쪽에서도 뒤로 빠지는 제스쳐를 취해달라'

    그러니까 경찰쪽에서 흔쾌히 오케이 합니다. 예비군이 경찰한테 확성기도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역시 바로 갖다 줍니다. 그리고는 남은 시위대에게 그 뜻을 전달합니다.

    물론 냉정하게 생각하면 후퇴는 힘빠진 시위대쪽에서 내밀수 있는 적절한 카드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열두시간 넘게 오직 앞만 보고 버티면서 체력도 다 고갈되고 이제는 그저 악만 남은 시위대들한테 되돌아가자구요? 이게 먹힐까요? 아마 '죽을 때 죽더라도 이자리에서 죽겠다'는 심정이었을겁니다.

    그 예비군이 시위의 지속과 시위대의 안전을 고려해서 그리 생각할 수는 있었다고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이번 시위의 참된 의미는 '어디로 갔어야 살았다' 하는 결과론적 양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찢겨질때 찢겨지고 죽을때 죽더라도 '나의 갈 길은 내가 알아서 정하겠다'는 자발적인 모습에 더 큰 의의를 두고 있는게 아니었습니까. (물론 비폭력의 큰 틀 안에서요)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에서도, 또 언론에서도 늘 중점적으로 부각시키는것이 비폭력과 바로 이 자발성인데 무려 '제스쳐'를 취해주는 '쇼'까지 부탁하면서 스스로 참여한 시위대를 이끌려 하다니요. 어불성설입니다.

    요컨대 '과정'이 중요합니다. 지금 모인 사람들은 단 1합에 처참히 깨지더라도 '스스로의 의지'를 더 중요시합니다. 그래야 깨질 때 깨지더라도 다음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모이게끔 할 수 있으니까요.

    누군가 시위대를 이끌려 한다면 물론 그 순간에는 도마뱀마냥 꼬리 끊고 질기게 목숨은 부지할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상명하복이 늘어날수록 참여는 점점 줄어들테고, 결국 시위는 또다시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해버릴겁니다.

    단지 추측이 아닙니다. 지난 20년간의 교훈입니다.
  • woody79 2008/06/02 02:29 #

    동감합니다. 도대체 예비군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요. 결국 그렇게 대치하다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지요. 어떤 아고리안은 저에게 종로 방향을 막아야 한다고 주절대더군요. 그때 함께 계셨던 분 같은데, 그때 전 연좌시위를 하지 않을 거라면 다시 후미로 시위대를 모두 돌계해서 종로쪽으로 가두시위를 계속하자고 주장했더랬지요. 계속해서 시민들에게 우리의 목소리를 알리고,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걸 알려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게 안 되더군요. 결국 후미쪽에서 퇴로를 결정하고 조금이라도 덜 연행당하고 피해를 줄이게 하는 역할밖에 전 할 수 없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지도부가 절실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 louis 2008/06/01 20:19 # 답글

    네...
  • woody79 2008/06/02 02:29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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